부마민주항쟁 시대정신은 3·15의거 주장
10·18 부마민주항쟁의 시대정신 흐름은 3·15의거를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에 제기됐다.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회장 정성기·68·당시 마산 상남 성당 주임신부)와 (사)부산 민주화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규)는 부마민주항쟁 32주년 만에 처음 발간한 '부마민주항쟁-마산 편·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라는 제목의 증언집에 이 같은 내용이 담겼다고 1일 밝혔다.
남부희 당시 경남매일(현 경남신문) 사회부장은 "부마민주항쟁은 제2의 3·15의거"라며 "자신은 3·15의거가 근대 한국 민족민주운동의 한 획이었고 마산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라며 이같이 증언집을 통해 소개했다.
그는 또 "3·15의거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전개된 민족민주운동의 시발점이다"며 "그것이 시대정신의 흐름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마산에서 두차례 걸쳐 유신반대 시위가 계획됐다"면서 "경남신문은 당시 정부의 나팔수가 아니었다"고 덧붙여 증언했다.
또 10·18 부마민주항쟁을 촉발한 대학생의 시위가 경남 마산이 부산보다 앞섰다는 증언이 나왔다.
김용백 당시 마산상남성당 주임 신부는 '미리 준비되었던 부마항쟁'이라는 제목으로 그는 "10·18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에 경남대 학생인 최갑순과 옥정애가 데모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한테 도움을 청했다"고 증언집에서 밝혔다.
그는 "그때만 해도 유인물을 만들려면 등사기로 밀어야 하는데 성당에 등사기가 있었고 혹시 도망갈 일이 생기면 제일 숨기 좋은 곳이 성당, 사제관이었다. 내가 숨겨주겠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부산 시위에 앞서) 첫번째 거사일이 9월말이었는데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째 거사일이 10월 22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그런데 18일에 (부산에서) 데모가 먼저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또, 신용수 당시 마산문화방송 기자는 "마산의 10·18부마민주항쟁은 대학생들이 먼저 시작했지만, 수출자유지역 근로자들, 어시장 상인들 등 저층 구조에 있던 사람들이 합류했다"며 "응어리진 것들이 있었고, 데모가 일종의 분출구가 됐다"고 밝혔다.
이밖에 이 증언집에는 사망자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부마민주항쟁 때 경찰에 의한 사망자가 있었다는 유족의 증언도 담겼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발간사에서 "증언집에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며 "우리 지역의 소중한 교육자료와 학술자료로 활용될 것이다"고 밝혔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오는 5일 경남 창원시 의창구 창원 웨딩의 전당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