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에 안전벨트를-팍팍한 서민의삶]전세도 억은 기본…결혼은 먼나라 이야기
최정승(35·가명)씨는 5년 동안 직장을 5번 옮겼다. 평균 근속기간은 1년이 안된다. 최씨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매번 회사에서 밀려났다.
첫 직장인 반도체 부품업체는 입사 첫해 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했다. 이유는 경영합리화. 최씨가 속한 사업부문은 이전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해당 부문 직원들은 대부분 해고됐다.
하지만 '신수종 사업 발굴'이란 명목 하에 뛰어들었던 사업이 사업자 난립으로 레드오션으로 변하면서 2년차 최씨를 비롯한 직원 3분의 2가 '경영상 위기'를 이유로 떠나야했다.
2번째 직장은 규모는 작지만 유망기술을 가진 코스닥 상장사였다. 이익을 공유하겠다는 대표의 말을 믿고 야근과 밤샘을 거듭했다. 야근비도 특근비도 없었지만 미래는 밝아보였다.
하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될 무렵 대표는 큰 돈을 받고 회사를 '벤처자본'에 팔아 넘겼다. 새 경영진이 정관에 신규사업을 추가할 때마다 회사는 동요했고 사람들은 회사를 버렸다.
이 과정에서 약속됐던 고용 보장이나 재취업 지원 등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최씨도 회사가 이름을 3번째 바꿨을 때 회사를 나섰다.
3번째와 4번째 회사도 똑같았다.
회사가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주인이 바뀌면서 흔들렸다. 그 것도 아니면 이익이 회사 성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샜다. 직원들은 그 과정에서 우수수 밀려 나갔다.
5년차 직장인인 최씨 연봉은 5년전과 비슷한 2800만원이다. 물가 인상률을 고려하면 경력이 늘었지만 연봉은 오히려 깎였다.
어느 순간 대기업에 들어간 동기들과 연락도 하지 않게 됐다. 자격지심 때문이다. 한때 같은 출발선에 있었지만 최씨와 이들의 연봉은 2배 이상 차이난다.
최씨가 고3이던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다. 자영업자인 부친의 수입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합격한 대학이 국공립대가 아니었다면 진학도 어려웠을 뻔 했다.
최씨는 첫 학기 등록금과 첫달 하숙비를 받은 것 외에는 자력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성공하겠다는 일념에 2004년부터 졸업을 미루고 행정고시를 봤다.
하지만 세상은 녹녹치 않았다. 고시 공부도 돈 없이는 하기 힘들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과거였다. 개인 능력이 승부를 가른다고 생각했지만 가진자와 못 가진 차이는 컸다.
출제 경향을 알기 위해서도, 모의고사를 보는데도 돈이 필요했다. 최씨가 매달 수십만원이 달하는 수험비용을 벌기 위해 하루 8시간 일 할 동안 경쟁자는 공부를 했다. 그만큼 격차는 벌어졌다.
3차례 낙방 후 7급으로, 9급으로 전향했지만 5년만에 시험을 접을 때까지 최씨는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최씨는 "고시식당 식권을 살 돈이 없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걸어가다 살을 빼기 위해 인상을 쓰고 피트니스센터 런닝머신을 뛰고 있는 경쟁자들을 봤을 때 자괴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그때 나는 월세 15만원짜리 창문도 없는 냄새나는 쪽방에서 버티고 있었다"고 씁쓸해 했다.
최씨가 결국 포기하고 취업문을 두드렸을 때 어학연수 경험도 인턴 경험도 없는 최씨를 불러주는 곳은 중소기업 밖에 없었다.
연인이 있지만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불안한 직장을 뒤로 하더라도 1억원을 웃도는 전셋집을 구할 능력이 없다.
서울에서 전용면적 84㎡ 규모 아파트 전세를 구하기 위해서는 평균 2억4893만원이 든다. 도시근로자 3인 이하 가구 월평균 소득 425만원을 전부 모았을 때 4.9년이 걸린다.
월급 실수령액 200여만원에 불과한 최씨가 지은지 25년된 반지하 단칸방 월세 35만원과 식비, 교통비, 통신비 등을 내고 나면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전셋집 마련조차 그림의 떡인 셈이다.
최씨는 영영 셋집살이를 벗어날 수 없을까봐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결혼을 하다고 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최씨에게 한달 평균 80만원에 달하는 양육비를 충당할 능력이 없다.
외벌이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기혼 여성의 5분의 1인 20.3%가 출산과 육아 등으로 경력 단절 상태라는 통계청 통계도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게 한다고 했다.
최씨는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꼬여버린 인생을 푸는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막다른 길을 향해 달려가는 기관차같아요. 잘못 됐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길이 보이질 않아요. 날선 작두 위에 서 있는 듯 한 두려움. 그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