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공세에 "생명 잃었다"…살 구멍 없는 구멍가게

2012-10-21     정의진 기자

 "그동안 구멍가게 꾸리면서 그런대로 밥은 먹고 살았는데…. 요즘은 뭐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자고 일어나면 우후죽순식으로 생기는 편의점에 등 떠밀려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나도 이 가게도 생명을 잃었어."

지난 2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10평(33㎡) 남짓한 한 구멍가게. 이 곳에서 15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봉현(가명·73) 할아버지를 만났다. 건물마다 들어선 편의점들 사이로 낡은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장 할아버지의 애물단지 '구멍가게'를 알려주는 유일한 표시다.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어떤 물건을 들여놔야 할지 모르겠어. 주변에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나는 편의점 때문에 장사를 접어야 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처량하지."

장 할아버지의 굽은 등 뒤로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과자와 라면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과자 봉지 위로 내려앉은 희뿌연 먼지가 장 할아버지의 오랜 기다림을 보여주는 듯 했다. "처음엔 저 건너편에 하나 있었는데 이제는 건물마다 1개씩이야. 온통 편의점에 둘러쌓인 채 나가떨어지게 생겼어."

장 할아버지의 희미하게 떨리는 한 손엔 리모컨이, 또 다른 손엔 먼지털이가 들려 있었다.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텔레비전과 가끔씩 날아드는 파리가 장 할아버지의 유일한 동무였다.

장 할아버지의 구멍가게를 자주 찾는다는 박금례(가명·54·여)씨도 인생의 조각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 쓸쓸하다고 했다.

"우리들 어린 시절에는 동네마다 조그만 구멍가게가 하나씩은 꼭 있었어요. 친구들 손을 잡고 호기롭게 가게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 '사탕주세요'라고 외치면 가게 아주머니가 항상 몇 개씩 덤을 얹어줬지요. 오래전 얘기지만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는데."

엄마 손을 잡고 외출할 때마다 골목 입구에 자리 잡은 구멍가게를 꼭 들렀단다. 가게가 크건 작건 박씨는 관심이 없었다. 엄마 심부름으로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러 구멍가게에 갈 때마다 그 조그만 알사탕이 먹고 싶어 마른침을 삼켰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거다.

당시 대부분의 구멍가게는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 셈이다. "저 아이는 누구네 몇째 아들인데 어느 대학에 붙었다 더라"부터 시작해서 "옆집 김씨는 어제 또 술마시고 들어왔다 더라" "동네 앞 새댁은 그렇게 싹싹하다더라" 등 온 동네 소문은 구멍가게를 통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구멍가게의 '외상' 서비스도 단연 인기였다. 박씨도 깨알같이 적혀있던 외상장부가 눈에 선하다고 했다. "꼭 깜지 같았어요. 그러다 외상 갚으면 연필로 쓱쓱 지우니 더 시커멓게 됐지."

옛 추억에 잠겨 빈 하늘을 바라보던 박씨의 얼굴에 여린 미소가 묻어나왔다. 씁쓸함도 배어있는 듯 했다. 박씨는 "이젠 그 추억의 구멍가게들이 '없는 것도 없고 문 닫는 날도 없는' 편의점에 밀려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최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1년 이후 4년 동안 전국의 구멍가게 1만1000곳이 문을 닫았다. 2008년에는 전년에 비해 5500곳이나 줄었다. 반면 대형마트와 편의점은 순항했다. 전년 대비 2007년 대형마트는 9.6%, 편의점은 22% 늘어난 것이다.

 

 올해 1월 통계청 고용동향 자료만 봐도 그 심각성을 가늠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1월 자영업자 수가 550만명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감소한 자영업자 수도 25만9000명으로 일용직(15만8000명)보다 더 많았다.

장기화된 경기불황으로 영세 자영업자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통상 가족들끼리 가게를 운영한다는 특성 때문이다. 임금 근로자보다 타격이 클 수 밖에 없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20여년 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현영춘(가명·80) 할아버지는 "대형마트와 편의점들이 들어서면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구멍가게 수 십곳이 장사를 접었다"며 "살 구멍이 없어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소규모 점포의 몰락에도 업계와 관련 당국의 대응은 여전히 소극적이다.

편의점 관계자는 "가맹점주들 역시 소상공인"이라며 "편의점을 규제하면 소상공인을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구멍가게의 편의점 가맹점 전환 비율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며 '구멍가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편의점 점포수 증가에 반감이 깊은 것 같다"며 "점포 출점은 소비자들의 니즈를 따른 것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편의점 본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고스란히 점주들에게 돌아온다고 항변했다.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며 대형마트 규제에만 신경 쓰는 관련 당국의 수수방관도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우리가 규제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게 아니다"며 "법령에 편의점 체인에 대한 의무휴업 규제 조항이 있어야 지자체에서도 조례를 발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편의점이 골목상권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당장 실현 가능한 대책 마련은 없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구멍가게 상인들의 태도 변화도 주문했다. 예전처럼 물건을 쌓아놓지 말고 가게를 깔끔하게 정돈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정부에서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쓰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상인들의 자생력을 죽이고 정부에게 손 벌리는 습관을 키울 수 있다"며 "스스로 일어나 아이템을 개발해야지, 미약한 상태로 있어선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구멍가게가 대기업이라는 큰 '빽'을 안고 있는 편의점과 경쟁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지우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