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놀러가도 숙소 비상구부터 챙기는 이기환 방재청장은
30년 넘게 소방관 생활만 해온 이기환 소방방재청장에게는 직업적인 버릇이 있다.
바로 '잠버릇(?)'이다. 이 청장은 출장이나 휴가를 갈 때면 절대로 5층 이상에서는 묵지 않는다. 돈을 더 주고라도 기꺼이 낮은 층에 숙소를 잡는다고 한다. 수 없이 많은 재난현장을 경험하며 생긴 특이한 버릇으로 아내에게 핀잔을 들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 호텔이든, 여관이든, 콘도든 어디서 자든지 바깥 잠을 잘때는 항상 비상구부터 먼저 챙기고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습관을 이 청장은 모두 '팔자'라고 간단하게 표현했다.
현직 소방관으로는 처음 소방방재청 총수가 된 이 청장은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보기드문 3대 소방관 가족이다. 그의 부친 고(故) 이극의 씨는 경북 구미소방서장이던 1986년 화재현장 지휘 후 사무실로 돌아와 쓰러졌다. 과로사였다.
이 청장은 "아버지가 대구 동부소방서 초대 서장을 지냈고 저는 같은 소방서에서 8대 서장을 역임했습니다. 지금도 동부소방서에 가면 부자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라고 아버지를 회고했다. 그리고 이 청장의 아들 역시 2010년 소방직에 입문해 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 청장의 부친은 자신이 소방관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이는 이 청장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아들이 소방관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 힘들고, 너무 위험하잖아요." 이 청장은 이 또한 '팔자'라고 웃어보였다.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며 소방관이 싫었던 그였지만 결국 소방관을 택했다. 막상 해보니 보람 있고 3대가 소방관을 한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 청장은 가장 감명깊게 본 재난 영화로 '분노의 역류'를 꼽았다. 이 영화는 형제 소방관 스티븐(커트 러셀분)과 브라이언(월리엄 볼드윈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작품으로 1991년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소방관들의 삶의 애환과 함께 방화범을 찾는 미스터리가 잘 어우러져 영화팬들에게 큰 감동과 재미를 주었던 영화다.
그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백드래프트(backdraft·밀폐된 공간에서 불이 났을 때 산소가 부족한 상태로 있다가 다량의 산소가 유입됐을 때 발생하는 불길 역류현상)'를 정말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말했다. 실제 화재현장에서도 백드래프트는 소방관들에게 공포의 존재여서 '악마의 불길'로 불리곤 한다고.
또 최민수, 차승원 주연의 한국영화 '리베라메'도 감명깊게 봤고 최근 개봉했던 '서서자는 나무'도 소방관들의 일상을 잘 나타냈다고 추천했다.
이 청장은 소방관과 막걸리의 '뗄 수 없는 인연'도 소개했다. 산소마스크도 없던 시절 소방관들은 화재진압 현장만 다녀오면 막걸리를 몇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다고 한다.
막걸리가 화재로 인해 목이나 코, 입 등에 남아 있던 그을음을 씻어주었기 때문이라며 추억했지만 소방관 생활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씁쓸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소방장비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선진국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인터뷰 하루 전에도 물탱크에 추락한 인부를 구조하다 순직한 고 김인철 소방장의 영결식에 참석했던 이 청장은 더 이상 소방관들이 안전장비를 갖추지 못해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