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신용은 안녕하십니까]②가계부채 911조·신불자 130만명…운명인가, 습관인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오모(27세, 여)씨의 하루하루는 지옥같았다. 대학교 3학년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생긴 학자금 대출이 문제였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충당하기 어려웠던 오씨는 결국 학자금 대출을 선택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을 하면 빚 정도는 쉽게 갚을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경기악화로 취직에 실패하면서 280여만원이었던 원금에 세 배 가까운 760만원의 연체이자가 붙었고, 갚아야 할 돈은 1060만원으로 불어났다. 오씨는 끝내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가 됐다.
개인사업을 하던 윤모(50세)씨는 요즘 새벽시장에 나가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사용한 카드사 대출과 대부업 대출 등이 문제였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면서 윤씨는 사업을 접어야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집과 자동차 땅을 모두 팔았음에도 3100만원(원금 2100만원, 연체이자 1000만원)을 못내 결국 금융채무불이행자가 됐다.
희귀난치성질환인 척추염을 앓고 있는 신모(44세)씨는 고통 속에서 서울의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누비며 의류납품과 배달 일을 하며 모은 돈과 은행에서 받은 대출 5000만원으로 7년 전 경기도 구리시에 17평짜리 다세대 주택을 장만했다. 하지만 내 집 마련의 기쁨도 잠시였다.
이자를 내가며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부친의 병원비, 5인가족의 생활비를 내던 그는 지난해 모 캐피털에서 연 32%가 넘는 고금리로 800만원을 빌렸고, 매일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버스 운전기사인 이모(52세)씨는 대부업체와 저축은행 등에서 빌린 2200만원에 대한 원금과 이자로 매월 110만원(평균금리 48%)을 내고 있어 늘 생활비가 부족했다. 결국 그는 노숙자로 전락했고 빚에 대한 압박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다.
26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2003년 카드대란 당시 400만명에 육박하던 금융채무불이행자는 대규모 빚 탕감과 신용회복 프로그램 등으로 현재 130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중 2만3094명이 빚을 못갚아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했고, 이들 대부분이 신용회복 지원 대상으로 확정됐다.
신용불량의 늪에서 고생하던 오씨와 신씨, 윤씨, 이씨 역시 정부의 신용회복 프로그램으로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학자금 대출로 금융채무불이행자가 된 오씨는 한국자산관리공사 신용회복기금에 문을 두드려 빚 1060만원 중 연체이자 760만원을 감면받고 원금도 22개월동안 나눠갚을 수 있도록 분할약정을 맺었다.
사업실패로 금융채무불이행자가 된 윤씨 역시 신용회복기금 채무재조정을 통해 연체이자 1000만원을 감면받고, 원금 2100만원은 8년간 매월 22만원씩 분할 상환하는 약정을 맺었다. 열심히 빚을 갚으면 원금 430만원도 유예받을 수 있게 됐다.
고금리 대출에 시달리던 신씨와 이씨는 전환대출을 신청청 고금리의 대출을 저금리 대출로 갈아탈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가계대출에는 문제가 없을까.
전문가들은 정부의 대규모 신용회복 노력으로 금융채무불이행자는 줄어들었지만 가계부채가 여전히 우리 경제의 심각한 뇌관이라고 입을 모은다.
호황기 때 금융권에서 과도하게 대출을 받아 부동산이나 주식 등에 투자해 자산을 늘려온 개인과 자영업자들이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빚더미에 앉게 됐고, 대출 구조 자체가 경제위기에 취약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계부채 절대량이 지난 3월말 기준 911조4000억원으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특히3곳 이상의 금융기관에 빚을 지고 있는 악성 다중채무자가 지난해말 182만명으로 4년만에 30만명 늘어나는 등 가계부채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
가계대출의 뇌관으로 불리는 자영업자 대출 역시 30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우리나라에사 고령자와 저소득층의 생계비 대출이 늘고 있는 점을 위험 요소로 꼽으며, "한국의 가계부채는 발생할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시장을 흔들 수 있는 '꼬리위험'과 금융충격에 취약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지출을 위한 부채가 늘어나면 실업 증가, 금리 상승, 경기 둔화에 민감해진다는 것이다.
무디스는 자영업자의 평균 가계부채(1억1395만원)가 일반 가계부채(5205만원)의 2배 이상이라는 점을 밝히며 "구조적 취약성으로 집값이 하락하거나 ‘꼬리 위험’이 발생할 경우 연체율이 급격하게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6일 뉴시스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꼬리위험의 가장 중요한 고리는 금융시장의 급격한 신용경색"이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만약 유럽 외에 미국과 일본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는 사태가 발생하고 급격한 신용경색이 올 경우 금융기관이 부채회수에 나서고, 가계가 빚을 갚기 위해 자산을 던지면서 부동산이 폭락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장기적으로는 가계 부채의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부채 구조를 일시 상환이 아닌 원리금 균등 구조로 바꿔나가야 한다"며 "개인들도 투자목적으로 과도한 빚을 지지 않도록 하고 신중하고 안정적으로 가계 재무를 관리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