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의 손이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 하나를 집어올렸다. 그것은 놀랍게도 립스틱이었다. 아우가 뚜껑을 열고 립스틱을 위로 밀어올렸다. 빨간색 립스틱이 흡사 어머니의 영혼인 것처럼 앙증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아우와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하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72)씨가 등단 41년 만에 처음으로 사모곡을 불렀다. 그간 한 번도 그 이름을 올린 적이 없는 어머니를 소재로 소설 '잘 가요 엄마'를 펴냈다.
어느날 새벽, 불길한 예감의 전화벨소리.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아우의 전화다. '나'는 시큰둥하게 전화를 끊고 평소와 다르지 않게 회사로 향한다. 이튿날 새벽에야 고향에 도착한 나는 짐짓 성의 없는 태도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다. 아흔네 살의 노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 잘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누운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어머니였다.
"어머니 시신을 염습대로 옮겼다. 나는 난생처음 누워 있는 어머니와 만났다. 그때까지 잠자리가 아닌 이상 누워 있는 어머니와 대면한 적은 없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그처럼 언제 어디서나 서 있는 사람이었다."
소설은 엄마의 죽음을 배다른 아우에게서 전해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결국 제발로 고향을 떠나 떠돌이로 살게 만든 엄마에 대한 원망을 노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엄마의 장례에 관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엄마에 대한 애잔함과 미안함이 자꾸만 나를 흔든다. 비록 육신은 한줌 뼛가루가 돼 흩어졌지만 어머니의 마음까지 흩어져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유명을 달리하는 순간 오히려 시나브로 다가와 나에게 아련히 스며들었다.
아무렇게나 떠난 엄마지만, 결국 나는 엄마를 아무렇게나 떠나보내지 못한다. 장례를 치르고 아우와 함께 돌아온 나는 엄마가 쓰던 싸구려 비닐가방 속에서 한 번도 쓰지 않은 립스틱을 발견한다.
"어머니가 그걸 써봤든 못 써봤든 몇십 년 동안 핸드백에 립스틱을 넣고 다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어머니 역시 여자였구나, 싶은 연민이 뒤통수를 쳤다."
어려운 살림을 챙기며 자식을 돌보느라 엄마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그 무엇, 엄마가 엄마임을 당연하게만 여겼던 자식들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바로 그 무엇. 엄마도 결국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무언가 어렴풋이 내 시선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먼지였다. 내 심장을 덮고 있던 미세한 먼지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안치실 냉동 캐비닛에 갇혀 있었으므로 성에가 하얗게 끼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씨는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마디뿐이었다"며 "그 외에 내가 고향을 떠나 터득했다고 자부했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했다"고 고백했다.
"이 소설은 그처럼 진부했었던 어머니에 대한 섬세한 기록이다." 276쪽, 1만2000원, 문학동네